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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중심에서 고통의 극복을 외치다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고

김수현 | 기사입력 2008/03/31 [00:00]

인생의 중심에서 고통의 극복을 외치다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고

김수현 | 입력 : 2008/03/31 [00:00]

작가 박완서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4녀 1남을 슬하에 키우던 중 88년 어느 여름,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교통사고로 떠나 보내게 된다. 유달리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작가는 가슴에 아들을 묻고 그 이유와 고통의 근원에 대해 신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신은 대답이 없었다. 작가가 믿고 있던 카톨릭의 신, 하나님은 그렇게 쉽게 대답하는 신이 아니기 때문일까. 작가의 고통과 번민, 악의에 찬 분노가 엉크러진 표독스런 독설에도 신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들을 잃기 전보다 더 신과의 독대가 잦아지면서, 아침에 신을 죽였다가 다시 저녁에 살리는 끊임없는 반복이 작가의 일상을 괴롭혀간다. 고통을 끊을 수 없다면 그 이유라도 알고 싶기에 신에게 매달려 보지만, 결국 부산에 있는 분도 수도원에서 만난 한 수녀의 지난 과거를 통해 나지막한 실마리가 주어진다. 그전까지 고통을 거부하려는 강한 의지와 현실을 부정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한 수녀를 만남으로써, 그 수녀의 고백을 통해서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현실을 인정하게 된다.

고통의 원인을 찾으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탐구는 성서의 한 책, 욥기서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욥기서는 인간의 고통이 왜,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지는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단지, 고통을 참고 이겨낸 의인은 신으로부터 더 큰 상을 받으며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즉, 욥기서는 고통의 극복을 통한 신의 은총을 강조할 뿐,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굳이 말한다면, '신의 자유' 정도일까.

영화 '올드보이'에서는 한 남자, 오대수가 아무런 이유없이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사방이 막힌 방에서 갇혀 지낸다. 꿈인가, 현실인가.

그는 무슨 잘못을 했길래,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렇게 지내야만 했을까.

마침내, 빠삐용이 탈출을 하듯, 젓가락으로 구멍을 내 바깥 세상의 비를 맛보지만, 그동안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오대수는 자신이 납치 당했던 그 장소를 통해 바깥 세상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을 가둔 존재가 '이우진'임을 알고 죽이려 하지만, 이우진의 한 마디로 인해 그와의 게임을 시작한다.

"지금 날 죽이면, '왜'를 알수가 없잖아요."

결국 이우진과의 게임 끝에 오대수는 자신의 15년간의 고통의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되도록이면 고통을 피하려 하고, 어쩔 수 없는 고통이 주어지면 그 고통의 원인부터 찾으려 한다. 원인을 찾아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원인이 없는 고통, 자세하게 말해보자면 원인이 자신의 범위를 벗어나서 시작된 고통이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다.

영어의 속담에는 이런 말조차 존재한다.

"Life is unfair." 

'한 말씀만 하소서' 제목에 나타나있듯이, 작가는 자신의 고통이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 그 이유를 신으로 부터 '한 말씀'만 듣겠다는 의지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신은 '한 말씀'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은 직접적인 계시보다는 환경과 사람을 통해 작가에게 계시한다.

결국, 작가는 자기 아들만을 사랑했던 편협한 사랑과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의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랑의 방법을 찾아내며, 동시에 고통이 '왜 내 아들에게 주어져야 했는가'의 질문에서 벗어나 '왜 내 아들이라고 해서 고통 받지 말라는 이유가 있는가'로 질문의 전환을 이루게 된다.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충고한다.

"왜 이우진은 오대수를 15년간이나 가두었을까'를 생각하지 말고 '왜 이우진은 15년만에 오대수를 풀어 줬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작가는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음을 '한 말씀만 하소서'를 통해 우리에게 '한 말씀'하고 있다. 


김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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