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제2의 창작물'로서 직역이냐 의역이냐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보다는 글 속의 상황과 문맥에 따라 좀 더 작가의 의도에 가까운 쪽으로 그때그때 트랜스포머처럼 변화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직역이 어울리는 상황에서는 직역을, 의역이 어울리는 상황에서는 의역을 적절하게 선택할 뿐이다. 하지만 올바른 번역을 위해 번역계는 직역이냐 의역이냐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해 왔다.
2003년 7월, 프랑스어 번역가인 백선희 씨가 이세욱 번역가의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 번역에 첨언이 지나치게 많아 원작의 느낌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담은 메일을 언론사에 보내 논쟁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사실 번역이라는 자체가 번역가가 직접 쓴 글이 아니고 원작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 원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는 점이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쓴 작품인데 나의 의도와 다르게 번역이 되어 내 이름을 걸고 다른 나라에서 팔리고 있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괘씸하겠는가. 백 씨는 이러한 면에서 원작에 최대한 첨언을 하지 않고 직역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자칫하면 편협해지고 한쪽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다. 언어는 반드시 1대1 대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백 씨가 문제를 제기한 번역본의 원어는 우리말과 계통이 다른 프랑스어이다. 원문 그대로 직역했을 때 한국 독자의 정서와 문화로는 이해가 어려운 부분에서 '원문 그대로 해야 한다'는 프레임에 갇혀 직역만을 고집한다면 과연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오히려 독자가 글을 읽을 때 내용을 알기 어렵고 원작자의 의도는 어둠의 저편 안드로메다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백 씨가 언급한 소설 32쪽의 문장 “시아버지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짜릿한 기분이 든다는 듯 몸을 떨었다”에서 백 씨는 밑줄 부분이 원문에 없기에 번역자의 ‘과도한 친절’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원문 그대로 “시아버지는 몸을 떨었다”라고만 번역한다면 독자들은 시아버지가 왜 몸을 떨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몸을 떨다’라는 우리말 표현은 보통 추위나 공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대목은 시아버지의 내면 변화를 발견해 가는 부분이기 때문에 심리적 해석을 첨가하는 편이 오히려 작가의 의도를 더 살리기도 한다. 65쪽의 문장 “나는 면이 알맞게 익었는지 씹어 보다가 혀를 데었다”라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백 씨는 밑줄 부분이 원작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스파게티의 익은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씹어 보는 일은 우리 문화에서 익숙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다짜고짜 혀를 데었다고 하면 독자들에게는 느닷없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이럴 때 번역가가 하는 약간의 첨언은 독자에게 오히려 적절하게 느껴진다.
반면에 의역 또한 작가가 분명 그 단어와 형식을 사용한 의도가 있음에도 가독성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지나친 의역’을 한다면 그 작가만의 개성과 매력을 살릴 수 없다. 작가가 몇 날 며칠 골머리를 앓으며 신경 써서 사용한 표현과 장치일지도 모르는데 번역가의 불찰로 놓친다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작가만 손해가 아니라 독자도 그 작가의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하나 놓치게 되는 것이다. 독자가 접하는 문장은 결국 원문이 아니라 번역가가 쓴 글이다. 번역가가 표현해 놓지 않은 작가의 의도는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하고 묻혀 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번역가는 한편으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원작이 훌륭한 작품일지라도 누가 번역했느냐에 따라서 온 국민이 읽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
어느 부분을 직역하고 의역할 것인가. 작가의 의도를 올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 ‘적절한 의역’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과도한 의역’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오늘도 번역가는 작가의 숲속에 독자들이 마음껏 쉬다 가도록 제대로 된 이정표를 만드는 일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조은소식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
깨치는 뉴스 많이 본 기사
|